아르놀트 하우저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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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작품은 하나의 도전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것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순응할 뿐이다. 그것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우리는 자신의 목적과 노력에 의존하며, 우리의 생활방식과 사고방식에 기원을 둔 어떤 의미를 작품 속에 불어넣는다.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예술은 그런 한에서 현대예술이 된다
각 세대들마다 다른 관점과 새로운 눈으로 예술작품을 본다. 그렇다고 해서 나중에 나온 관점이 이전의 관점보다 낫다고 가정할 수는 없다. 그 양상들은 각기 그 당대에 모습을 드러내며, 이것을 미리 예견할 수도 연장할 수도 없다. 그러나 그 의미는 사라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한 작품이 다음 세대에게 띠는 의미란 그 이전에 있었던 여러 해석들의 전반적인 폭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확실히 예술의 질과 대중성 사이에는 늘 어떤 긴장이 있기 마련이며, 때로는 요즈음 현대예술에서 보는 것처럼 미해결의 갈등이 있다. 무언가 가치있는 예술은 루소가 말한 '자연인'이 아니라 어느 정도 문화적 수준에 달한 사람들에게 속해있다. 다시 말해서 예술에 대한 이해는 어떤 교육적인 선결조건에 달려 있으며 따라서 그것의 대중성은 필연적으로 한정될 수밖에 없다.
결국 우리는 관념론자이거나 실재론자이거나 둘중에 하나이며, 천재란 하늘로부터 떨어지는 것인가 아니면 지상 위에서 스스로 형성된 것인가하는 문제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궁극적인 문제를 누군가가 명확하게 결정한다고 하더라도 경제적 조건을 이데올로기로 옮기는 일은 결코 완전하게 규명될 수 없는 과정으로 남는다. 그것은 어느 지점에서는 갭을 내포하기도 하고 또 어느 지점에서는 갑자기 비약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물질적인 조건으로부터 정신적인 것으로의 이행만이 이러한 종류의 비약을 내포한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하나의 정신적인 형식이 다른 형식으로 넘어가는 모든 전이, 양식과 유행의 변화, 옛 전통의 붕괴와 새로운 전통의 부상, 한 예술가가 다른 예술가에게 미친 영향이나 심지어 한 예술가 안에서 일어나는 방향의 전환 - 이 모든 변화들도 마찬가지로 불연속적이며 설명할 수 없는 사실들이다. 외부에서 보면 모든 변화는 돌발적인 것으로 보이며, 엄밀하게 말해서 이해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연속적이고 점진적인 변화는 오로지 우리가 주관적이고 내적인 체험을 가질 때 느끼는 어떤 것과 같다. 즉 그것은 객관적인 자료로 재구성될 수 없다.
예술작품의 복합성은 작품에 대한 체험적인 다양성에서 뿐만 아니라 그것이 여러가지 동기들이 배열되는 교차점에 놓여있다는 사실에서도 명백히 드러난다. 요컨대 예술작품은 세가지 조건, 즉 심리학적, 사회학적, 양식사적 조건에 의해 결정된다. 개인은 사회적 인과관계 안에서 여러 가능성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심리적 자유를 스스로 보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 조건 - 을 통해 때때로 한정되기는 하지만 - 을 보고는 결코 예견할 수 없는 새로운 가능성을 끊임없이 창출하고 있다. 창조적 개인은 새로운 '표현 형식'을 창조하지 기성의 진부한 형식을 찾지 않는다. '이미 만들어져 있는 것'은 그에게 긍정적이기 보다는 부정적인 성격을 띤다. 다시 말해서 그의 작품은 그때그때의 역사적 순간마다 불가능한 것으로 보였던 것, 즉 생각할 수도, 느낄수도, 표현할 수도 더구나 이해할 수 조차 없는 것의 총체였던 것이다. 물론 '한 시대에 허용되지 못했던 것'은 늘 다음 시대에 확립되기 마련이다. 현재는 항상 무정부상태이고 개인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모든 일을 다 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중에야 개인적으로 결정했던 일들에 하나의 일관된 방향을 부여하는 사회적인 법칙이 스스로 윤곽을 드러낸다. 마찬가지로 양식사의 선线도 나중에야 서서히 눈에 띄기 시작하는데, 그러한 선의 흐름에 따라 완전히 아무렇게나 선택한 것처럼 보이는 개인적인 표현 형식이 배열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양식사적 방향'이 개인적인 노력에 대하여 '사회사적' 발전 경향보다 훨씬 분명한 객관적인 법칙성을 주고 있다. 과거를 되돌아보면 각자각자의 개인은 사실 '자율적인 양식사조'를 옮기는 운반인에 불과하다. 그러나 양식사는 심리학적 인과관계나 사회학적 인과관계 가운데 어느 쪽도 떨쳐버릴 수 없다. 왜 일련의 예술적 발정니 어느 특정한 시점에서 뚝 끊어져 버리는가, 그리고 계속 앞으로 더 진보하거나 확대되지 않고 양식적으로 급선회하여 전혀 다른 공간으로 옮겨 가는가 하는 문제는 순전히 형식적인 양식적 근거에 의해 설명될 수는 없다...발전의 최정점은 내적인 기준에 의해 확정될 수 없다. 어떤 양식적 형식이 심리학적, 사회학적 법칙에 따라 형성된 시대정신을 더 이상 표현할 수 없을 때 급격한 선회가 일어나는 법이다.
미켈란젤로가 트렌토 종교회의 시대, 즉 근대 자본주의와 절대주의가 태동하는 새로운 정치적 리얼리즘의 시대에 살았다는 점만을 주목할 때, 그가 씨름했던 예술적 문제에 대해서 도대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이런 것들을 알면 아마 그의 지칠 줄 모르는 예술적 투혼, 마니에리즘으로부터 그의 예술이 그은 획기적인 전환, 그리고 그의 마지막 작품들에 나타나는 감동적인 애매성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위대성과 비길 데 없이 높은 예술적 목표의 숭고함은 이런 식으로 설명될 수 없다. 이것은 렘브란트를 예술가로서는 출세시켜 주었지만 인간으로서는 파멸케 했던 그의 사회・경제적 조건을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런 지식이 그의 천재를 설명해주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여기서 사회학적 고찰의 명백한 한계가 드러난다. 그러나 그런 한계가 있다면 그 한계는 무엇을 뜻하는가? 사회학이 렘브란트와 같이 빼어난 예술가의 작품이 지니고 있는 궁극적인 비밀을 벗겨낼 능력이 없다고 해서 사회학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마저 포기해야 할까? 바꿔 말해서 렘브란트 예술의 사회적 전제조건, 나아가서 동시대의 프란다스 화가들, 특히 루벤스 예술과 뚜렷하게 구별되는 양식적 특성의 사회적 전제조건을 밝히는 일마저 단념해야 할 것인가? 프란다스의 바로크 예술과 네덜란드의 자연주의와 같이 판이한 유형의 두 예술이 거의 동시에 발생했다고 하는, 다른 방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런 사실에 조명을 비출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무시해야 할까? 이런 방식으로는 루벤스의 웅장함과 렘브란트의 신비함이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러나 루벤스의 작품이 궁중, 귀족적인 사회에서 만들어졌고, 렘브란트의 작품이 '내면화'의 경향을 띄기 시작한 시민사회에서 만들어졌다는 사회학적인 확증 이외에 이같은 양식적 차이에 대한 발생적 설명은 없다...렘브란트와 루벤스는 서로 독특하기 때문에 비교할 수도 없다. 그러나 그들의 양식이나 운명은 그렇지 않다. 그들의 예술적 발전 과정과 생애의 변화가 전혀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닌 만큼 그들의 예술이 보이는 차이를 그냥 그들 특유의 체질이나 개인적인 천재 탓으로 설명할 수는 없을 것 같다.